삶과 예술 사이에서 전보경은 2017년부터 숙련공 또는 장인들을 찾아 다니며 그들의 신체에 각인된 몸짓들과 말들을 수집하여 책과 영상, 설치 작업으로 재구성해 왔다. 노동하는 몸의 움직임에서 그 결과물로 환원되지 않는 가치와 의미, 또는 아름다움을 찾고자 했던 이 작업들은 올해 <아직 쓰여지지 않은 소곡>(수림아트센터, 2020)이라는 전시로 한 자리에 모였다.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전시는 노동과 아름다움이 통합되는 선명한 비전을 제시하기보다 그 두 개의 범주가 가까이 끌어당겨지면서 발생하는 질문들을 드러낸다. 노동하는 몸은 왜 아름다운가? 산업화 시대에 그것은 흔히 세계를 떠받치는 힘과 생산성이 형상화된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것은 강철처럼 단련되는 것, 기계와 같이 또는 기계와 더불어 작동할 수 있기 때문에 가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보경이 전시장에 불러낸 사람들은 그런 방식으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이들이 평생 동안 반복해온 움직임은 분명한 목적이 있으며 여전히 동작하지만—다시 말해 이들은 몸에 익은 몸짓으로 여전히 맛있는 과자를 구울 수 있고 단정하게 머리를 자를 수 있지만—그것은 더 이상 하나의 세계, 가족, 또는 그저 한 사람을 떠받치는 생업이 되기 어렵다. 효율적인 최신 기술 시스템 앞에서 구식 기술을 가진 숙련공의 몸은 상대적으로 비생산적인 것으로 낙인 찍히고 설 곳을 잃는다. 전보경은 숙련공들의 몸짓을 생산 과정에서 분리하여 신화적, 전기적, 역사적 이야기 속에 재배치함으로써 이들을 구식화된 생산 수단이 아니라 외부 환경과의 상호 작용 속에서 스스로 빚어진 하나하나의 온전한 존재로 회복하고자 했다. 여기서 노동하는 몸은 예술하는 몸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은 것으로 그려지는데, 단순히 유용하거나 이익이 되는 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어떤 일에 성실히 임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는 일은 정확히 무엇이라고 말해질 수 있고 또 무엇을 지향할 수 있을까? <아직 쓰여지지 않은 소곡>에서 숙련공들과 그들을 형상화하는 작가는 모두 세계 속에 이미 주어진 것들을 조율하여 그 안에 내재하지 않았던 무언가를 이끌어내는 매개자 또는 변형자로 상정되며, 이들이 각자의 일을 제대로 수행했을 때 그 결과는 조화롭고 아름다울 것이라고 기대된다. 궁극적으로 이 같은 작업의 목적은 맹목적 생산에 매진하는 세계의 경제적 총체성을 벗어나 삶에 내재하는 생성 또는 어떤 시적 차원을 활성화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전보경은 세계를 방랑하는 교양소설의 주인공처럼 여러 사람을 만나면서 각자에게서 조금씩 예술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배움을 얻는다. 거기에는 미술사에 남은 예술가들의 성취가 아니라 자신과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생한 삶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고 그것을 실마리 삼아 예술이라는 미지의 영역에 접근할 수 있다는 끈질긴 믿음 또는 소망이 있다. 현실을 관찰하지만 결국은 그 너머를 보고 싶어한다는 점에서 전보경은 사회학자나 인류학자보다는 근대의 화가들에 더 가깝다. 그렇지만 그가 작업으로 가져오는 것들은 시각적인 재현의 대상이기 이전에 인간이 세계와 상호작용하는 다양한 양상들을 예시하는 하나의 본보기로 성립한다. 이를테면 <아직 쓰여지지 않은 소곡>은 각각의 사람들이 보여주는 고유한 삶의 흔적만큼이나 그들 모두를 아우르는 노동이라는 삶의 방식을 전면화한다. 이들의 삶은 세계에 대한 생산적 노동을 지향하지만 언제나 경제적 관점에서 정당화할 수 없는 비생산적 상호작용을 포함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장인들의 삶에서 이 두 개의 차원은 실질적으로 분리 불가능하게 일체화되어 있다. 그러나 흔히 ‘행복에의 약속’ 또는 현세에서 신의 현현과 유사한 어떤 초월적인 것과의 순간적인 마주침으로 묘사되는 아름다움을 정말로 믿는다면, 그것은 노동에 깃드는 이질적인 것이지 노동의 직접적인 산물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다시 말해 그것은 비생산의 수수께끼 속에 잠겨 있다. 전보경의 최근 작업들은 이러한 비생산적 차원에 초점을 맞추면서 다른 예술가들, 특히 생산적 노동과 가장 대척점에 있다고 여겨지는 무용가들과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공기는 귀가 되고, 귀는 눈이 된다>(2020)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배움을 구하는 시각 예술가가 청각 장애가 있는 시각 예술가, 자신의 몸을 예술적 도구로 구사하는 무용가와 함께 순수한 감각과 운동의 장치로서 신체를 가동하고 서로의 감각을 나누는 작업이다. 소리를 촉각적 진동으로서 자신과 다른 사람의 신체, 더 나아가 생명 없는 물체 사이를 가로지르는 일련의 움직임으로 지각하고 표현하는 것은 엄밀히 자연 현상도 아니고 노동도 아니다. 그것은 외부적 목적의 도구가 되지도 않고 자기가 아닌 무언가를 대상화하지도 않으나 고유한 지향을 가지고 외부의 자극에 감응한다. 흔히 비생산적 신체로 간주되는 장애인의 감각-운동적 배치를 그 자체로 세계 속의 존재가 외부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또 하나의 특정한 양식으로 받아들이고 함께 연구하면서 세 작가들은 각자의 삶과 작업의 지평이 조금씩 넓어지는 것을 경험한다. 또 다른 무용가들과 함께 진행한 (2020)은 생산적 노동에 최적화된 로봇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흉내내면서 그와 어긋나는 인간의 비생산적 움직임을 증폭해 보는 작업이다. 여기서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활동 간의 경계선 또는 그런 정확한 구별이 흐려지는 지점에 대한 관심은 다시 돌아오지만, 삶과 예술은 통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끌어당기는 동시에 밀어내면서 상호 활성화하는 두 개의 극으로 재정립된다. 전보경의 작업에는 아름다움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인간의 힘으로 보편적인 아름다움만을 정제하여 대상화하는 것은 결국 불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꾸준히 뒤따른다. 이는 그가 예술의 성전이 아니라 사물들과 사람들의 삶 속에서 무언가 반짝이는 것을 찾아서 가져오려고 계속 애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것은 노동보다는 목적을 확정할 수 없는 어떤 탐구에 가깝다. 아름다움은 초월성에 대한 암시와 엮이면서 암묵적으로 비현대적인 범주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으나 그렇기 때문에 여전히 예술이라는 시대착오적인 것을 수면 아래에서 정박시키는 가상의 닻으로 기능한다. 지난 세기의 생산성 숭배가 유능하지만 쓰일 데가 없는 사람들과 사물들이 과잉 생산되는 자기 파괴적인 세계로 귀결된 곳에서, 예술이 불러낼 수 있는 어떤 너머의 차원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고 어떻게 접근 가능할까? 이는 간단히 답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쉽게 버려도 좋은 질문은 아닐 것이다. 윤원화 / 시각문화 연구자. 저서로 『그림 창문 거울: 미술 전시장의 사진들』, 『1002번째 밤: 2010년대 서울의 미술들』, 역서로 『광학적 미디어』, 『기록시스템 1800/1900』 등이 있다. <다음 문장을 읽으시오>(일민미술관, 2014)를 공동 기획했고,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2018에서 <부드러운 지점들>을 공동 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