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유효한 질문에 대하여

김선옥(아트 스페이스 풀 큐레이터)

전보경의 작업은 ‘새삼스러운’ 질문에서 출발한다. 예술가는 누구인지, 노동은 예술이 될 수 있는지, 어디까지 예술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지 예술을 재정의하려 한다. 그러나, ‘이것이 예술이냐 아니냐’ 식의 해묵은 질문 대신, 작가는 예술과 비예술 사이의 이분법적인 경계 짓기를 거부하고 오히려 둘의 안팎을 적극적으로 드나드는 방식을 택하여 예술을 밖에서 다시 들여다본다. 그가 구축한 상황에서 소위 ‘비예술인’의 몸을 통해 생산되는 움직임은 전보경이 지시하거나 질문하는 과정을 통해 구성된다. 대상을 다루는 방식에 있어 전보경이 취하는 전략은 스스로 밝혔듯이 ‘이야기꾼’의 역할을 기꺼이 자처하는 것이고, 이것은 주로 구술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가 들려주는 타인의 세계는 그것이 체현된 ‘몸’을 통해 전달된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이 실체를 드러내는 순간, 이야기는 긴 침묵의 공백을 깨며 발화하기 시작한다.

작가가 신체를 작업에서 적극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개인전 《뿔의 대화: 대위법》(2015, 갤러리 조선)부터라고 볼 수 있다. 그는 과거에 인간의 몸에 존재했지만, 현재는 퇴화하여 사라진 추상적인 기관을 ‘뿔’이라 지칭하고, 이 3차원 도형을 개인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형상화했다. 영상작품 <세 개의 선과 평행한 궤도>(2015)에 등장하는 3인의 무용수들은 뿔의 형상을 이루는 가로, 세로, 대각선의 선을 각자 주관적으로 해석하여 보여주었다. 그래서, 이들의 몸짓은 상호합의 상태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서로의 몸이 다르게 기억하고 있는 선의 움직임을 즉흥적으로 구현했고, 이것은 학습된 몸짓과는 다른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이 무용수들은 전시 오프닝 행사에서 진행된 퍼포먼스에 재등장하였다. 이들의 몸이 전시장에서 실존하게 되는 순간, 이들의 움직임은 추상적인 것을 발화하기 위한 언어로서 작동하기 시작하였다. 퍼포머들의 몸짓을 통해 뿔은 이들이 이해한 세계의 한 형상이 되었다.

전보경은 개인의 신체에 흡수된 기억을 따라 새로운 움직임을 생산한다. <현자의 돌>(2017) 시리즈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은 양장사, 땅콩 가게를 4대째 이어온 사람, 전통 과자를 45년 동안 만든 사람, 이용원을 5대째 물려받아 이어온 사람 등이고, <갈대가 바람에 흔들리더라도>(2016) 에는 시트선팅 수공업자, (2019)에는 전통 손인형극 장인이 등장한다. 오늘날 신자유주의 시대에서 점차 사라져가는 직업군에 속하고 사회의 주변부에 있는 이들의 삶을 작가는 사실적으로 담는 것보다 오히려 그들이 예술 안으로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방식을 택한다. ‘생산한다’는 것은 대상을 어떤 맥락에서 떼어내 다른 맥락 속에 두는 것, 대상을 존재론적으로 \ontisch\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대상을 부정된 맥락(그렇게 있어서는 안 되는 상태의 세계)에서 떼어내, 긍정된 맥락(마땅히 그렇게 있어야 하는 상태의 세계) 속에 두는 것이다. 전보경이 대상에게 익숙하지 않은 움직임을 지시하는 행위는 대상을 새로운 세계에 현전하게 함으로써 대상이 속해 있던 세계와의 단절을 의미한다. 비록, 이 단절이 일시적일지라도 대상은 자신을 스스로 주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 행위는 대상이 속해 있는 세계를 마냥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세계를 발견하는 과정을 통해 기존의 세계를 재인식하게 만드는 것에 가깝다.

작가는 대상을 사실적으로 재현하거나 서사화된 다큐멘터리 형식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한편, 대상과 일정한 거리두기를 유지하면서 이야기를 기록한다. 그리고, 작가가 직접 만난 이들의 소소한 일상, 삶의 애환, 복잡한 가족사에 귀 기울이며 밀도 높은 대화의 과정을 거쳐 나온 이야기의 중심에는 ‘몸’이 있다.

전보경의 작업에 등장하는 신체는 이미 몸에 각인된 생존을 위한 노동의 움직임을 소거하고, 기존과 전혀 다르게 작동하기 시작한다. 그들의 세계가 체현된 몸은 외부로 확장하여 언어 자체가 되었고, 스스로 발화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그들의 몸은 새롭게 생산된 미학적 움직임을 제시한다. 작가가 미술의 언어로 환원시킨 ‘비미술인들’의 몸짓은 단지 그들의 삶과 노동을 전시(展示)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새로운 몸짓으로 생산되는 그들의 사적인 이야기는 개인이 다른 개인들과 관계 속에서, 또 사회 속에서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다시 읽게 만드는 일련의 기록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보면 오늘날 ‘미술인들’의 생존하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의도적으로 ‘미화’된 그들의 몸짓 뒤에는 치열한 현실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전보경이 그들의 이야기를 쉽사리 지나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그 이유 때문이 아닐까.

다양한 장소에서 현지인들과 맺은 무형적인 경험은 최근 작가의 작업의 중요한 소재가 되었다. 대전, 요코하마, 인천, 타이페이 등 전보경은 여러 지역의 레지던시에서 머물며 그 장소에서만 가능한 작업을 지속하고 있다. 이것으로 장소특정적 작업이라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그의 작업은 개인의 삶을 통해 장소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장소를 재규정한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작가들은 이동의 제약 없이 다양한 도시의 레지던시를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 물리적인 경계가 사라지고 장소에 대한 귀속감은 낮아지고 있는데, 장소의 의미에 천착하는 것은 어쩌면 부질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장소의 탈영토화는 실로 물리적인 장소의 고정적인 정체성을 해방시켰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회의 폭이 넓어진 환경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하게도 작가로서 생존하기는 더욱 어려워진 현실에서 전보경의 유목민 같은 삶은 그 선택의 이유를 따져 묻기 전에 어쩌면 그의 작업의 구조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장소’를 개인의 몸이 기억하는 역사로 상정한다면, 개인은 장소를 점유하는 주체가 되어 그곳의 정체성을 규정할 수 있게 된다. 전보경의 작업 구조는 개인이 장소를 구체화함으로써, 기존에 대상을 억압했던 체계에서 자신을 스스로 해방한다는 점에서 대상에 새로운 작용이 일어나도록 만든다.

예술의 가능성에 대해 의심하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현실의 갈급한 시의적 문제들에 가려 예술에서 무엇을 먼저 다루어야 하는지 우선순위를 함부로 판단하곤 한다. 그러나, 예술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은 어떻게 보면 가장 동시대적이며, 예술의 언어로 세계에 형태를 부여하는 것이 가능한가를 묻는 것이 아닐까. 이것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전보경도 자신의 언어로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자신이 보고 있는 세계를 ‘다시’ 보여주기 위한 시도를 하는 것일 테다. 이 과정을 통해 그가 만들어내는 몸짓들은 궁극적으로 작가가 다루는 대상을 존재론적으로 변화시키기에 충분한 시도가 될 것이다. 그리고, 미술에서 여전히 우리가 질문하고, 듣고, 이야기해야 할 것들이 남아있음을 환기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