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긋나면서도 이어지는 움직임 그리고 오류 신승오 페리지갤러리 디렉터 전보경은 오랜 노동을 통해 특정한 동작에 익숙해진 인간 신체의 움직임에 관심을 가지고 작업을 해 왔다. 그는 선장, 이발사, 재단사, 북을 만드는 장인, 손가락 인형극사 등 다양한 전문직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에게 평소에 일하는 동작을 그 대상이 없는 상황에서 재현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노동에 기반한 움직임은 그들 스스로는 익숙해서 의식하지 못하지만, 개별적인 그들의 직업적 특성을 드러내는 동작들이다. 이러한 퍼포먼스는 어떤 특정한 작업을 해나가면서 삶을 유지하기 위해 정해진 움직임을 반복하면서 완성된 동작으로, 비개성적이고 어딘가에 종속된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우리가 유명한 TV 프로그램에서 보아서 알 수 있듯이, 동일한 작업을 하더라도 자신만의 방식을 찾아내기도 하므로 이는 다른 시각으로 보면 개성적인 동작이기도 하다. 작가는 이러한 노동에 의해 만들어지는 움직임에 관심을 가지면서, 주어진 틀 안에서 명확한 목적성을 가진 동작들이 예술이 될 수는 없을까라는 의문에서 작업을 진행해 왔다. 이번에 선보이는 은 이전의 연작들과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어 나간다. 작가는 인간의 신체를 대신하여 노동하는 기계의 움직임에 관심을 보인다. 그는 그중에서도 자동차 공장에서 부품을 조립하는 로봇팔을 대상으로 삼았다. 작가는 이러한 로봇팔이 만들어지기까지 그 기준이 된 것은 인간의 움직임이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효율적인 움직임을 도출한 결과를 적용한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2채널의 영상으로 이루어진 은 로봇팔의 생산 움직임을 드로잉으로 바꾼 스코어를 바탕으로 서로 다른 몸의 습관과 한계점을 가진 4명의 퍼포머가 재해석하는 움직임을 담아낸다. 퍼포머들이 작가가 제시한 스코어를 해석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실험적인 안무의 완성을 위한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그들이 수행하는 움직임의 목표는 단순히 로봇팔의 움직임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움직임이 기계의 동작 안에서 발견되거나, 인간과 전혀 다르게 구동되는 요소들에서 새롭게 감각하게 되는 것들을 해체하여 분석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는 지금 여기라는 현재의 시공간에서 드러나는 인간이 보여주는 실존적 움직임을 파악하기 위함이다. 그렇기에 이번 작업에서 중요한 지점 중 하나는 작가의 스코어와 퍼포머들이 안무를 계획하고 완성해 나가는 과정과 결과이다. 따라서 먼저 이에 대해 살펴보자. 작품에서 보이는 안무의 시공간에서의 움직임은 정서적인 표현보다는 기계가 작동하는 알고리즘과 유사한 명령어들을 수행하는 것과 같이 보인다. 이렇게 그의 이번 작업은 제한된 공간에서 생산 효율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반복적인 작업이 가능하게 만드는 움직임 연구를 바탕으로 하였다. 예를 들어, 2장 시간 동작연구에서 왼쪽 영상의 텍스트는 길브레스(Gilbreth)가 <서블릭(Therblig)>이라 명명한 ‘찾는다, 집는다, 운반한다’ 등 인간의 움직임을 18가지 동작 원소로 구분한 것을 나열한 것이다. 오른편 영상의 텍스트는 이에 영향을 받은 바안즈(Barnes)의 <신체 사용에 관한 원칙>이다. 여기서 ‘양손의 동작은 동시에 시작하고 동시에 완료해야 한다’, ‘보면서 실행해야 하는 동작은 줄이도록 한다’는 효율적인 작업을 하기 위한 움직임에 기본이 되는 지침이다. 또 다른 요소인 ‘직선적 급방향 전환보다 선회를 연속적으로 실행해야 한다’나, ‘곡선의 동작이 정지 동작보다 더 신속하고 용이하며 정확하다’는 인간의 움직임이 가진 패턴에 기인한 결론이다. 이렇듯 우리가 알고 있는 인간의 동작에 기반한 움직임에 대한 연구는 사실 인간의 경제적인 생산성을 증대하기 위해서이고, 이는 나아가 인간을 대신할 대체 도구 개발에 방향이 맞추어져 있다. 이렇게 로봇팔은 한정된 공간에서 더 나은 효율성을 목표로 하는 필요에 의해 개선되고 발전해왔다. 따라서 작가가 로봇팔로 대표되는 기계들의 움직임에 대한 연구를 통해 제시한 스코어에서 퍼포머들은 가장 상징적인 ‘효율적인’과 반대되는 비효율적인 움직임으로 해석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들이 보여주고자 하는 퍼포먼스는 ‘이것은 이런 것이다’식의 기계와는 다른 신체표현 그 자체와 그로 인한 다름의 결과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영상에서의 안무는 퍼포머들이 균형을 잡으려 하고, 뛰어오르고, 회전하고, 끊임없이 팔을 휘젓는 등 반복적인 움직임 보여준다. 또한 클로즈업된 시선으로 퍼포머의 미세한 떨림, 완벽하게 구현하지 못한 자세, 퍼포머가 원래 가지고 있던 버릇 같은 것들을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달한다. 여기에는 어떤 지시성도 찾아보기 힘들고, 무엇인가를 재현하거나 표현하지도 않는 것처럼 보이며, 오로지 지속적인 움직임으로만 나타날 뿐이다. 이러한 움직임과 함께 등장하는 텍스트는 퍼포먼스와 들어맞는 듯하면서도 어긋나면서 퍼포머가 취하는 동작을 모호한 장면으로 만들어 낸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야기하기 전에 을 다시 살펴보자. 이 작업에서 두드러지게 감각을 자극하는 요소는 격자와 영상 전반에 흐르는 사운드이다. 영상은 격자의 틀을 통해 퍼포머의 움직임을 보게 되며, 이러한 장치는 자연스럽게 그들의 동작을 분석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예를 들어, 균형과 비례, 각도, 회전, 정확도와 같은 것이다. 하지만 영상의 시작부터 나오는 손뼉을 치는 장면에서 알 수 있듯이, 반복적인 행위에서 인간이 정확한 똑같은 자세를 실행할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 반대로 기계는 이러한 비효율적인 행위를 완벽하게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하지만 작가의 영상에서는 무엇이 기계적이고 인간적인지에 대한 구분이 힘들다. 오히려 여기에서의 제로는 아무것도 아닌 것에 가깝다. 따라서 작가가 말하는 제로는 기계와 인간이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혼종적인 몸으로 인식하는 그의 태도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1장 신체에서 ‘우리는 유령(움직이는 정신)이자 몸(움직이는 기계)이다’라는 문장은 비물질적인 정신과 몸은 기계와 인간을 동시에 염두해 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인간과 기계 사이의 빈틈을 파고들어 연결하는 또 다른 요소는 사운드다. 영상의 전반에 흐르는 메트로놈의 균일한 리듬의 소리는 기계적인 반복과 측정이라는 개념을 비물질적인 형태로 인식하게 만든다. 그러나 균일한 리듬은 점차 다른 박자의 메트로놈 소리와 겹쳐지면서 엇박자로 변화하면서 단단하던 틀에 균열을 가져온다. 이러한 상황에 맞물려 반복적이고 군집된 움직임을 보여주던 퍼포머들은 어느 순간 화면에서 점점 더 기계도 아니고, 인간도 아닌 어중간한 개별적인 동작들로 조금씩 흐트러진다. 그리고 퍼포머들이 정지된 동작으로 멈춰있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갑자기 영상은 끝나버리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온다. 여기서 끝난 줄 알았던 영상은 이내 ‘문제가 생겨 작동이 중지되었습니다’와 ‘다시 시작하십시오’라는 문구로 오류가 발생했음을 알린다. 이러한 오류로 인한 중단은 인간의 관점으로 보면 새로운 단계로 넘어가는 시작을 의미하기도 하고, 기계적인 관점에서는 쓸모가 다한 죽음과 끝을 동시에 의미한다. 이렇듯 그의 작업은 기계와 인간의 구분이 명확한 것처럼 접근하지만, 사실 가장 가까이 연결되어 있으며, 결과적으로는 애매모호한 상태로 순환된다. 작품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작가가 이번 작업에서 주목하는 것은 오류이다. 여기에서 오류는 다시 말하면 문제없음이다. 이것은 인간에게는 사회의 규칙을 반복적으로 이행하고 그 경계를 넘지 않는 것이다. 특히 기계는 설정한 입력값에서 벗어나는 행위를 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실수를 반복하며, 효율적이지 못한 행동을 한다. 또한 기계도 언제나 문제가 발생한다. 물론 인간이 행하는 오류는 기계와는 달리 자신의 선택에 의해 의도된 것으로 쓸모없어 보이는 지식을 추구하고, 남들이 관심을 두지 않거나 터부시되는 것을 스스럼없이 자유롭게 표현하거나,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멈추지 않으며, 기존의 규칙을가볍게 위반하며 새로운 의미를 도출하기도 한다. 그러나 위에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산업화 시대를 거치면서 표준형과 효율성을 통해 최대한의 효과를 창출하기 위한 노력으로 특정한 기준과 규칙이 정해져 있는 틀에 우리를 맞추어 왔다. 이는 현대적인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각자가 가진 개인적 차이는 무시되고, 획일적인 움직임을 만들어 내는 동시에 기계를 정반대에 위치시켜놓고 경쟁해 왔다. 그렇다면 기계는 인간과 명확하게 구분되는 다른 존재인가? 작가는 그렇지 않다고 보고 있다. 기계라는 신체 그 자체는 인간의 오류의 산물이며 인간과는 다른 움직임을 획득하고 있지만, 그 결과에 다다르기 위해서 거치는 수많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결국 인간의 특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따라서 작가는 인간과 기계의 이분법적인 시선으로 서로를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의 효율성과 인간의 비효율성을 겹쳐 놓음으로써 오히려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새로운 움직임을 만들어 왔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작가는 기계와 인간의 움직임 연구를 통해 우리의 시공간을 효율성과 발전이라는 개념으로 점유해왔던 객관적 시간성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러므로 작가가 보여주는 에서의 퍼포먼스는 이러한 굳어진 시공간에 균열을 내고 유동적인 시공간으로 변환시키기 위한 작업이다. 그렇기에 그의 작업에서 퍼포먼스는 연속성을 가진 기계, 인간, 기계, 다시 인간의 순차적인 움직임이 아니라, 조금씩 어긋나긴 하지만 서로에게 개입하면서 그 구분을 명확하게 할 수 없는 혼재된 움직임으로 반복되며 이어지는 것이다. 이제는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작가는 이전의 작업에서부터 노동과 같이 한정된 틀에서 움직이는 행위 그 자체가 예술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계속해서 해오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 작업에서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하지만 신체 연구는 이제 단순히 이것이 예술이냐 아니냐를 구분하는 판단의 문제에서 다른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는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기계적 움직임 안에서 보이지 않게 된 인간의 신체와 여기에서 파생된 기계의 관계성을 회복시키고 이를 통해 예술의 역할에 대해 고찰하게 만든다. 이렇게 이번 신작은 어떤 예술에 대한 결과론적인 가치 판단보다는, 작가의 어떤 행위가 기존의 것을 다른 것으로 변환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실행의 문제로 옮겨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전보경이 이번 작업에서 집중하고 있는 것은 필요와 불필요, 효율과 비효율성, 쓸모 있음과 쓸모 없음을 어긋나게 만들어 모호하게 만드는 개입이다. 따라서 작가가 인간과 기계의 움직임을 작업으로 매개하면서 가시화되는 오류는 이러한 관계성 안에 숨겨져 있는 비가시적인 지점들을 드러내기 위한 예술적 태도 그 차체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기존의 주어진 경계에 균열을 가져 오며, 기존의 방식에 오류를 유도한다. 그리고 이는 그의 작업에서처럼 무엇인가를 멈추게 만들지만, 이내 새로운 방향으로 움직이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전환의 계기를 만들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