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하는 거주자의 알레고리적 실천– 전보경이 동시대 미술에 간섭하는 방식에 관하여

서동진

전보경 작가의 궤적은 동시대미술의 현장에서 레지던시라는 제도를 통해 생존하는 작가의 전기(傳記) 혹은 인류학적인 자료로서 손색이 없는 듯하다. 물론 이런 훔쳐보기의 태도가 작가 스스로에게는 탐탁지 않은 것이리란 걸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그러한 호기심을 지우기 어렵다. 1990년대 이후 유학을 다녀온 시각예술 작가들은 호기심과 욕망에 의해서이든 아니면 생존을 위해서이든, 레지던시라는 제도에 의지해 왔다. 전시를 위한 기회는 희박하며, 작업을 할 공간을 마련한다는 것은 더욱 힘들고, 넓디넓은 미술계에서 ‘오지랍’은 좁디좁은 작가들이라면 마침 등장해 구원의 손길을 뻗어가던 레지던시는 고육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또한 작은 유토피아적인 장소라는 것도 무시할 수 없다. 전보경 작가와 만났을 때 첫 대화의 주제가 탈출이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더 이상 더 나은 미래가 없을 듯 뵈는 세계에 살 때, 도래할 찬란한 내일을 기대하기 어려울 때, 우리는 다른 곳을 찾는다. 미래 시제의 시간은 다른 곳이라는 공간으로 이항(移項)된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여행을 꿈꾼다. 여행이란 적어도 혁명은 불가능하겠지만 탈출은 가능하도록 도울 터이니.

레지던시는 점점 더 추상화되는 공간(플랫폼 자본주의니 물류자본주의니 하는 말들이 알려주는 공간 경험의 증발 혹은 소멸)의 지각, 경험에 맞서 특정한 장소에 깃들거나 머물며 그 장소에서 유래하는 경험, 이미지, 서사 등을 재현하고 공유하도록 이끄는, 미술의 제도적 실천 항목 가운데 하나이다. 미술의 지구화를 앞장 서 실천하는 비엔날레의 범람은, 아마 모르긴 몰라도 세계를 누비는 비즈니스맨들 만큼이나 시각예술 분야 작가들이 지구적 이동성을 촉진하였다. 물론 그러한 지구화된 전시제도의 범람은 이중적이다. 그것은 ‘글로벌 미술(global art)’이라는 일시적으로 번쩍 유행하였다가 사라지는 세계적인 패션으로서의 미술을 성행하게 하지만 동시에 그에 불려온 작가들에겐 자신이 기원한 세계의 증언자이자 보고자로서의 역할을 하도록 강요한다. 지구화가 정체성을 지운다는 세간의 기우와 달리 그것은 또한 자신의 출신에 더욱 얽매이도록 부추기기도 한다. 그런 탓에 비엔날레나 국제적인 관광 명소가 되어버린 미술관들의 인기와 반목하는 듯 보이는 레지던시가 큰 의미를 갖는 셈이다. 그것은 어느 인류학자의 말을 빌자면 점차 비-장소(non-place)가 되어가는 동시대 미술의 현장에 맞서 장소를 탈환하려는 시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레지던시를 지켜본 이들은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실제 사정은 뭐……,” 라며 시큰둥한 대꾸를 쏟아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레지던시를 드나드는 이들 가운데 이미 이주와 유랑에 익숙하고 탈출의 경험을 지속하고자 하는 이들이 있다면 이는 다른 의미로 다가설 것이다. 그들은 그곳에서 한시적 유토피아를 찾고 원주민 없는 세계에서 원주민을 상상하며 인류학자와 같은 모습으로 진정한 자신의 습속에 따라 살아가는 이들을 만나고 있다는 자기최면을 스스로에게 거는 지도 모른다. 그것은 장소가 없는 곳에서 장소를 경험하도록 촉구하는 미학적-윤리적 압력을 마다하지 않고 유령과 허깨비, 잔해를 찾아서라도 그 장소에 관한 이야기를 구축한다. 장소는 이제 외적인 물질적 세계라기보다는 내면적인 주관을 통해서 간헐적으로 등장했다 사라지는 대상이길 반복한다. 이는 또한 오늘날 미술이 현실과 상관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현재의 미술은 세계라는 초월적인 장소, 구체적인 경험에 정박된 개인이 아니라 인민이나 시민 같은 주체를 위한 세계를 구상하고 제안하는 일로부터 너무나 먼 곳에 있다. 그러나 그것을 섣불리 패퇴나 타락이라고 부르지는 않기로 하자. 그런 일이 여전히 가능하다고 믿는 것이야말로 가장 형편없는 관념론자의 몸짓일 것이기 때문이다. 공간과 시간을 연결하는 로지티스틱스(logistics)의 촘촘한 네트워크에 의해 시간과 공간이 극단적으로 추상화된 세계에서 우리는 자신의 지각적 경험으로부터 표류하지 않기 위하여 지금-여기의 생생함에 매달리기에도 벅찬 처지인지 모르겠기 때문이다. 하이데거 식의 현상학적 관념을 빌어 말하자면 현존재로서의 머묾(dwelling)에 집착한다. 현기증 나는 이동의 소용돌이 속에 살아가면서 방향상실을 모면하기 위하여 우리는 장소의 느낌과 이야기, 신화에 몰두한다.

미국에서 돌아온 이후 레지던시를 유랑한 전보경 작가의 작업은 서울의 이태원-대전의 원도심(原都心))-요코하마의 코가네초-인천의 자유공원 등을 배회한다. 이 각각의 장소명은 어떤 장소-경험도 갖지 못한 세계에서 자신의 이야기와 경험이 서식하고 있는 장소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환상을 위한 이정표로 구실한다. 그런 점에서 장소특정적인 설치와 퍼포먼스로 구성된 전보경의 작업은 인류학적인 유사-민족지(pseudo-ethnography)가 아닌 어떤 장소-동화(fairy tale)를 생산하는데 애쓴다. 그러나 장소에 홀린 듯이 지내는 것은 위험한 일이 될 수도 있다. 전보경 작가의 본격적인(?) 장소-동화가 시작된 대전-원도심을 둘러싼 작업은 방문자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잊지 않는다. 그곳은 낯선 곳이며 그 낯섦은 작가가 관찰한 이물스럽고 낯선 대상 세계를 수집하고 전시하는 몸짓 속에 드러난다. 거기에서 저자성은 관찰하는 외부인으로서의 거리를 드러내는데 기여한다. 공감, 참여, 동일시라는 장소-특정적 작업의 압력은 작가라는 저자성을 감축시키도록 압력을 행사한다. 오늘날 예술가는 누구일까. 민족지학자나 인류학자처럼 자신이 입회한 세계에서의 경험을 보고하는 자인가. 이런 물음을 던지는 비평가들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사상가이든 사업가이든 사회운동가이든 대체적인 역사학자이든 미술가의 숱한 역할 놀이에 그만 얼이 빠진 우리로서는, 예술가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방편이 그가 전시장에서 이름을 듣게 되었을 때라는 것을 빼고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요코하마의 장인-노동자들이 우아하게 자신의 노동-동작을 시뮬레이션할 때, 그리고 자신의 ‘업무’를 시적 서정이 가득한 말로 읊을 때, 작가는 그 공동체에 이미 포함되어 있음을 증언하기 위해 아무런 말없이 카메라 뒤에 숨어있다. 저자성은 나쁜 모더니즘의 유산이 아니다. 그것을 부인하는 척하는 것이야말로 위선이다. 셀럽(celeb)화 되어가는 예술가 정체성은 저자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나쁜 방식으로 활개 치는지 증언한다. 작가는 저자로서 어떻게 관여하여야 하는가를 두고 씨름한다. 레지던시를 전전하며 그는 주민이 없는 세계의 주민으로 자신을 등재하고 바깥 없는 곳의 바깥을 누빈다. 그의 작업이 오늘날의 미술이 놓인 처지를 상징하는 알레고리처럼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일지 모르겠다. 그렇기 때문에 전보경의 자문자답은 흥미롭고 또한 신랄하다. 전시 <대위법>을 위해 제출한 그녀의 작업과 상관된 텍스트인 「소설 전보경」에서 그녀는 자신을 사회주의자와 형식주의자 사이에서 동요하는 작가로서 희화화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물론 가난한 이웃과의 도덕적 연대를 표하는 사회참여예술의 한 종목을 사회주의적이라 말하는 것은 과할 수 있고, 사회적인 것으로서의 형식이 아닌 내용으로부터 탈출한 형식을 탐한다고 형식주의자라 이름붙이는 것 역시 맹랑한 일일 수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자가 되는 것과 형식주의자가 되는 것 어느 하나 쏙 마음에 들지 않고 그에서 벗어나고자 정신분석에 관심을 기울이는 건 어떨지 딴청을 피울 때, 우리는 전보경의 청량한 진심을 엿보게 된다. 그녀는 현실에 충실한 미술이 되려는 이의 알리바이로서 구실하는 사회주의와 예술 자체에 헌신하는 시늉을 대신해주는 형식주의 모두를 미심쩍어하며 기꺼이 머뭇거린다. 그것은 예술과 정치의 관계를 사색하는 전보경의 진심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눈여겨 볼 작업이 있다. 전보경의 이력 가운데 이례적인 작업이라 할 라는 일종의 아티스트북은 어머니의 어머니의 땅과 자신의 땅 사이에 놓인 거리를 측량하며 유토피아적이었던 어머니의 어머니의 세계와 그 시대의 이상과 자신이 놓인 그 모든 이상이 배반당한 세계 사이에서 겪는 슬픔을 토로한다. 그녀는 정치적 이상주의는 프로파간다일 뿐이라며 의심한다. 그러나 모든 것이 노골적인 프로파간다가 되어버린 세계에 우리는 이미 살고 있다. 셀피(selfie)와 인스타그램(Instagram), 페이스북(Facebook)의 자아(self)-프로파간다에서부터 포퓰리즘 정치인이 보여주는 벌거벗은 정치 프로파간다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모든 게 죄다 프로파간다처럼 보이는 냉소주의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런 점에서 그녀의 회의적인 태도가 향하는 길이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녀는 프로파간다에 반하는 프로파간다의 주모자가 될까, 아니면 모든 프로파간다-자본주의적 이미지의 프로파간다에 대한 미술계의 은어는 물론 스펙터클(sepctacle)일 것이다-에 손사래를 치며 ‘소확행’의 즐거움에 심취한 세계에 간섭하는 시비꾼이 될까. 그러나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은 자신의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작가 전보경은 계속 스스로 심의할 것이란 점이다. 그리고 그런 뚝심이 그리 흔치 않은 것이란 점을 덧붙이는 것 역시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